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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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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령군(瑞寧君) 문희공(文僖公) 사암(思菴) 류숙(柳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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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19-02-20 16:51 조회3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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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316(충숙왕3)~1368(공민왕17) : 고려 공민왕 때의 정치가, 학자, 문인, 공민왕의 반원자주개혁정치의 설계자, 공민왕의 스승, 삼봉 정도전의 스승

[개설]
 본관은 서령(瑞寧, 지금의 서산시), 자는 순부(純夫), 호는 사암(思菴), 시호는 문희공(文僖公), 군호(君號)는 서령군(瑞寧君)이다. 고려말 문신 김영돈(金永旽)과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지은 안축(安軸)의 문생(門生)이다. 공민왕의 스승이며 장자방으로 공민왕의 반원개혁정치의 설계자이다. 문인으로는 삼은(高麗三隱)의 한 사람인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과 조선창업공신 삼봉 정도전(鄭道傳)이 알려져 있다. 고려충신 73위 중 마지막 배향공신(配享功臣)이 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16년 서주군(瑞州郡, 지금의 서산시) 삼봉리(三峰理) 출생, 1331년(충혜원년)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1340년(충혜왕 복위 1)과거에 급제하여 安東司錄이 되었으나 충혜왕의 명으로 공민왕의 스승인 시학(侍學)으로 10년간 원나라에 머물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함께 고려에 돌아와 공민왕의 책사(策士)인 유악(帷幄)으로 공민왕의 1차 반원개혁정치를 설계하고 추진하였다. 원나라의 승상(丞相) 탈탈(脫脫)이 공민왕에게 처벌을 요구하여 잠시 파직하였다. 1352년 연경에서 왕을 보좌한 공으로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 1등 상(上)을 받았다. 이후 우대언 등 왕의 곁에서 여러 벼슬을 거쳐 추밀원학사가 되었다.

공민왕(恭愍王)의 반원개혁정치(改革政治)를 추진하고 뒷받침하는 세력은 크게 세 부류가 있었다.
첫 번째 세력은 류숙(柳淑)을 중심으로 하는 수종공신(隨從功臣) 세력이며 류숙(柳淑)과 김득배(金得培)는 과거에 급제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수종공신(隨從功臣) 세력은 가장 혁신적이고 진취적이라 말 할 수 있었다. 특히 류숙은 공민왕의 장자방으로 모든 개혁을 설계한 인물이었다. 아직 30대의 젊은 세력이었고 최후까지 공민왕을 지키려했던 세력이었다.

두 번째 세력은 홍언박(洪彦博)을 중심으로 하는 외척(外戚)세력 이었다. 홍언박(洪彦博)은 공민왕(恭愍王)의 어머니 명덕태후(明德太后)의 조카로 공민왕(恭愍王)의 외사촌 형이다. 명덕왕후의 의중(意中)을 전달했을 것으로 보이며 공민왕(恭愍王)의 가장 든든한 지지세력 이었을 것이다.

 세 번째 세력은 이제현(李齊賢)을 중심으로 하는 공민왕(恭愍王) 추대(推戴) 세력이다. 이제현은 문인으로 단단한 학맥(學脈)으로 형성된 세력이며 그의 문하에 있었던 이곡(李穀)과 이색(李穡) 부자와 더불어 개혁세력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개혁성향에 대해서는 비교적 중립적이었다.
 
 류숙(柳淑), 홍언박(洪彦博), 이제현(李齊賢) 3부류는 서로의 유대감(紐帶感)을 공고히 하면서 공민왕의 반원개혁에 힘을 실어주고 이끌어 갔다. 

 1356년 추밀원학사로서 다시 2차 반원개혁정치를 설계하고 실행하였다. 먼저 친원파인 기황후의 오빠 기철 일당을 제거하고 내정간섭을 일삼던 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파(破)하였으며 인당(印璫)으로 하여금 요동의 일부의 성을 공격하여 회복하게 하였으며 동북면 병마사 유인우 장군으로 하여금 쌍성총관부를 격파하고 함주(咸州)의 여러 진을 회복하게 하였다. 또한 원나라의 연호를 정지시키고 몽고풍을 일소하는 강력한 개혁정치를 실행하여 성공시켰다. 반원개혁정치를 성공시킨 공으로 안사공신(安社功臣)을 받았고 추밀원사가 되었다.

 1361년 홍건적이 20만이 고려를 침공하여 고려는 위기에 처하게 되자 공민왕을 복주(지금의 안동)로 피신시키고 군사를 정비해 총병관 정세운(鄭世雲)과 김득배(金得培),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등으로 하여금 개경으로 진격해 홍건적을 완전히 물리치게 했다. 이듬해 이런 공로를 인정하여 충근절의찬화공신(忠勤節義贊化功臣)을 받았으며 서령군(瑞寧君)에 봉하여 졌다. 이듬해에 공민왕이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청주에서 왕명으로 지공거(知貢擧) 우시중 홍언박(洪彦博)과 함께 동지공거(同知貢擧)로 과거를 주관하여 박의중(朴宜中), 강호문(康好文), 김자충(金子盅), 설장수(偰長壽), 이숭인(李崇仁), 정도전(鄭道傳), 안경온(安景溫) 등 33명의 문생(門生)들을 얻었다.

 1363년 김용(金鏞)이 흥황사의 변을 일으키자 아들 류실(柳實)과 함께 공민왕을 무사히 구출한 공(功)으로 흥왕토적공신(興王討賊功臣) 1등을 하사받게 된다. 그해 관품은 중대광(重大匡)에 올랐으며 겸직으로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상호군(上護軍), 영서운관사(領書雲館事)의 벼슬에 올랐다.

 1365년 신돈(辛旽)이 등장하고 간교한 속임수를 쓰는 그를 멀리하였으며 공민왕에게 물러날 것을 청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1367년 그의 충직을 두려워하던 신돈의 모함으로 장류(杖流)되고 영광으로 유배를 갔다. 1368년 신돈이 보낸 자객에게 유배지 영광에서 교살 당하였다. 1371년 신돈이 처형당한 후 공민왕은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시호를 문희(文僖)로 추증하고 왕명에 의해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1376년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어 고려의 마지막 배향공신(配享功臣)이 되었으며 1377년 목은 이색이 묘지명을 찬하였고 1385년 문생 삼봉 정도전이 지석(誌石)을 세우고 제문(祭文)를 지었다.

[정치활동과 업적]
원나라에서 공민왕의 학문스승인 시학(侍學)으로 왕재의 자질을 다듬어 주었고 공민왕이 왕위에 오른후 공민왕의 유악(帷幄, 장자방)으로 고려의 자주적 반원개혁정책을 실현하여 성리학적 세계관인 왕도정치에 기초하여 공민왕을 도왔다. 원명교체기에 국토를 회복하고 몽고풍을 일소하여 고려역사에 가장 빛나는 업적을 이뤘다. 또한 그의 제자 정도전은 조선창업에 큰 역할을 하였다.

[학문세계와 저술]
류숙 선생은 유학자로서 조선조 사림파 학자들의 학사선(學士仙) 즉, 조선 성리학자들의 신선으로 추앙되었으며 저서로는 “사암집”이 있으나 현전하지 않으며 “동문선”에 훌륭한 한시가 16수 남아있다. 특히 “벽란도”, “독사”, “정과정”은 훌륭한 한시로 평가 받고 있다.

[상훈과 추모]
상훈: ①1352년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 1등 상(上), ②1356년 안사공신(安社功臣), ③1362년 충근절의찬화공신(忠勤節義贊化功臣), ④흥왕토적공신(興王討賊功臣) 1등, ⑤1376년 배향공신(配享功臣). 총 5회에 걸친 공신록에 등재되어 있다.

추모: 고려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 충남 서산의 성암서원에 배향, 경기 파주의 고려통일대전 배향,

[가문]
서령(瑞寧)류씨는 고려 말 공민왕으로부터 류숙(柳淑)이 봉군(封君)을 서령군(瑞寧君, 현 서산시의 옛 이름)으로 하사 받으면서 시작되었고 서산류씨라고도 한다. 서령(瑞寧)류씨의 선대는 한미 하였지만 공민왕의 반원개혁정치의 설계자이고 공민왕의 스승이며 장자방이었던 서령군(瑞寧君) 류숙(柳淑, 1316~1368)부터 시작하여 11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며 려말 선초의 신흥 3대 명문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류숙(柳淑)의 제자 삼봉 정도전이 조선 창업의 지대한 공헌을 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서령(瑞寧)류씨는 류성간(柳成澗)을 시조로 삼고 있으며 문화(文化)류씨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또한 류숙(柳淑)의 종제(從弟) 류방택은 조선창업의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드는데 혁혁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국내에서 발견한 소행성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고, 2006년부터 서산시에서 '유방택 별축제'가 열리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천문기상과학관이 건립되었다.

류숙 선생의 아들 류실(柳實)은 무장으로 이름이 높아 고려사 열전에 전한다. 손자 류기(柳沂)는 태종때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의 옥사에 관련되어 처형되었고 증손자 류방선(柳方善)은 조선의 두보로 이름났고 고손자 류윤겸(柳允謙)은 세종의 한글을 사용하여 처음으로 두시언해를 편찬하였다.